번역일기 3월호 (2부)

우연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첫 세 달 사이 사고 난 번역물을 수정해 달라는 요청 대여섯 건과 번역가 시험 평가를 서너 건 받았다. 매우 흥미로웠던 것은 사고 난 번역물(고객 항의가 발생한 번역물)은 거의 기계 번역만도 못한 수준이어서 다 재번역으로 짭짤하게 돈을 챙긴 건이었다는 점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중 3건이 내가 블로그에서 여러 차례 씹었던 에이전시이다. 그곳과 일한 지는 한 6, 7년 되었으나 거의 잊을 만하면 일거리가 오는 그런 회사였다. 글로벌한 프레젠스를 지닌 회사임에도 불구하고 두 차례인가 중간에 번역 요율을 인하해 달라며 요청하면서 요율을 할인 안 하면 일감이 줄 것이라며 "협박"하는 회사였다. 원래 갑질하는 거래처랑은 거래 안 하는 것이 나의 지론이고 나의 당당한 인건비는 받겠다는 나인만큼(게다가 물량도 어차피 많지 않았다) 꿋꿋이 거절했다.

아무래도 기계번역의 여파로 일감이 다소 감소한 지금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회사에서의 물량이 증가 추세다. 11월부터인가 갑자기 물량이 늘기 시작했다. 우선 두 개의 사고 건이 접수됐다. 하나는 이름만 대면 아는 굴지의 IT 기업이다. TM과 함께 받았는데 이전 TM의 품질이 정말 형편없었다. 주로 마케팅 자료인데 "어찌 이런 번역을 이 회사가 썼지?"란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원래 나한테 물량도 안 오던 것이었다. 
TIP: 여기서 번역에 관한 한 가지 팁 들어간다. 번역 실력은 법률 문서에서 가장 뚜렷이 알 수 있다.
기술적이지 않은 번역의 품질을 볼 때 번역가의 실력을 가장 잘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이용약관이나 면책조항 등이다. 사실 면책 조항 하나만 보면 번역가의 실력을 금세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대략 이렇다. 법률 문서는 단어를 그대로 직역해야 한다. 단어 하나라도 놓쳐서는 안 된다(물론 예외는 있지만). Fluency란 미명하에 제멋대로 의역하는 번역가도 드물지만 있다. 이건 절대 금물이다. 법률용어는 단어 하나 하나에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다. 문장이 길고, that which, noun phrase 등 온갖 게 난무하기 때문에 익숙하기 전에는 제대로 번역하기 까다롭다. 사실 100단어를 훌쩍 넘는 문장도 있는데 그 난이도 때문에 한 시간 넘게 걸리는 경우가 있다(이전에 Private Offering Memorandum 몇 만 단어를 번역할 때 1주일 늦은 적 있다. 역시 굴지의 금융기관이 작성한 POM인지라 온갖 잡스러운 내용이 들어 있었고 나의 마감 시한 흑역사이기도 하다. 난이도를 이해해줘서 다행히 벌 안 받고 넘겼던 작업인데 100단어 이상 문장의 연속이었다. 이런 법률 문서는 제멋대로 의역하지 말아라. 
1. Fluency의 미명하에 마음대로 의역하지 말아라 대다수 번역가가 토를 달고 아마도 침을 튀기며 이론을 제기하겠지만, 나는 감히 말한다. 상업 번역가는 의역하면 안 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시비를 줄인다. 고객 또는 감수자와의 시비를 줄인다. 내용이 정확하면 시비를 걸어도 넘어간다. 소위 "공장 번역가"는 이해되는 글을 제공하면 된다. 가끔가다 "번역투"가 아닌 완전한 한글을 써야 한다고 핏줄 올리는 멍청이도 있으나, 웃기지 말아라. "공장 번역"에서는 정확성이 "FLUENCY"보다 우선이다. 소위 "처음부터 한글로 쓴 듯한" 글을 쓰려면 완전한 의역이 되어야 하는데 이는 소설 얘기지 상업 번역에선 "금물"에 가깝다. 영어는 매우 정밀하다. 함부로 단어 떨구면 원작자가 열받는다. 완전한 의역을 원하면 그건 내부에서 처리해야 한다. 나는 외국회사의 장으로 일하면서 외부 번역물을 받아봤다. 못마땅하지만, 내가 손보고 넘어간다. 외부 사람은 내부 사정을 알지 못한다(물론 ms나 구글 등 통용되는 한국어가 있으면 다르지만, 웬만한 기업 문건이나 마케팅 문건은 아니다). 그리고 외부에 번역 맡겨야 제대로 나오지 않을 번역물은 내가 직접 처리했다. 긴 공장 번역가 생활 속에서 완벽하게 의역된 번역물 한 번도 못 봤다. 어차피 다 "번역투"다. 그 정도의 차이일 뿐... 국내 외신 봐라, 어디 번역투 아닌 글 있나. 참고로 번역가의 품질은 메이저 언론 외신 기자보다 못한 수준이어도 무방하다. 시간도 적고 번역가 실력이 메이저 신문 기자의 글 품질만 못해도 무방하다. 아니면 기자보다 월급을 더 주든지... 한 가지 예를 들자, 국내 대기업이 사용하는 우리 회사의 이용약관을 김&장에서 번역했는데, 중요한 문서인지라 꼼꼼이 살펴봤는데, "감탄"했다. 당시 나는 번역 일은 하지 않고 있었는데 놀라웠다. 역시 김&장이란 생각이 들었다. 완전한 직역인데 정말 잘 읽혔다. 단어 선택과 어순만 바꾼 글이었다. 커리어 초기에 외신 기자로 출발했다가 다른 길을 걸은 나여서 그런 식으로 번역하는 문건은 처음 보았다. 다시 말하지만 "감탄"했었다. 그때 그 3페이지 짜리 이용약관에서  배운 바 많다. 그리고 1월에 동계 올림픽 문건을 캐나다에 거주하는 한 여성 번역가와 함께 작업했는데, 그 역시 단어 하나 안 떨구는 번역가를 보았는데, 내가 경험한 상업 번역가 중 단연 에이스급이었다.그러니 함부로 의역하지 말아라. 직역하되 단어 선택과 어순으로 최대한 부드럽게 읽히면 된다.
2. 본인의 역할이 뭔지 잊지 마라나는 좀 sarcastic한 축에 속할 것이다. 평소 지론이 네 꼬라지를 알라다. 상업 번역을 제대로 하려면 번역 공장이 되어야 한다. 요즘은 공장이 되어도 시간당 임금은 말도 안 되는 수주이지만... 이런 와중에도 번역가들 중에 가장 역겨운 사람들이 마치 자신을 무슨 작가쯤 되는 것으로 착각하는 자들이다. 나는 그들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그리도 잘 쓰면 퓰리처 작가가 되든지, 소설을 쓰든지, 그 실력이 안 되면 최소한 서적 번역 쪽으로 옮기라고. 우리는 상업 번역가다. "함부로" 다른 번역가 씹지 말고 내가 잘 쓰네, 니가 잘 쓰네 다툴 일 없다. 글 되면 다른 판에 가서 놀아라. 자기가 하는 일에 과도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의 가장 큰 폐해는 자기 자신에게 너무 만족하여 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상업적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은 상업적인 수준에 맞느냐다. 자신의 번역 요율에 적합한 퀄리티를 제공하면 된다. 그리고 이 한마디 꼭 더하고 싶다. 자신의 실력 70-80%만큼만 발휘하면 된다. 회사일도 그렇듯이 상업, 즉 실제 세상은 대학 입시와 다르다. 적당히 하면 된다. 이거 상업 번역가에게 매우 중요한 덕목이다. 자신의 70-80% 역량으로 번역물에 문제가 발생하면 번역을 업으로 삼으면 인생 고달프다. 참고로 나는 번역물에 임할 때 항시 시간을 책정한다. 시간당 얼마이고 수주 단가가 얼마이니 몇 시간 내에 마친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 여전히 7년 전 요율을 고수하고 있는 나로서는 나이 탓에 스피드와 정밀성(오타, 비문 등) 떨어지고 업계 현황이 현황인지라 약간은 시간 측면에서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기는 해서 슬프다. 하지만 절대 주어진 시간 20%를 넘기지 않는다. 대개는 여전히 맞춘다.상업 번역을 하다 보면 굴지 기업의 극비 문서를 번역하는 것에서부터 휴대폰 앱의 "여세요" "편집하세요", 그리고 심지어는 성 추행과 관련한 직원 간의 메신저 내용까지 번역하기도 한다. 따라서 일률적인 단어당 $xx, 이런 게 어불성설이다. 글로벌 대기업의 기밀 유지 정책과 같은 문서를 번역할 때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 가장 어려운 문서를 번역할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그에 소요되는 시간을 기준으로 자신의 번역 요율을 적용하되 쉬운 문서에는 할인 요율을 적용하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자신의 70-80% 역량만 퍼부어라.
3. 다툴 것은 다투고 번역가다워라이건 1번 팁과도 연결된다. 필자의 경험에 비춰볼 때 이러하다. 아마 내가 작업한 수 천 건의 번역물 중 시비 붙은 적 10회 미만이다. 대부분은 씨잘데없는 시비다. 주로 초짜 손님인 경우다. 감수자가 시비를 거는 적도 있겠으나 5회 미만이었다. 특히 번역물을 받아본 적 없는 고객이거나 감수자이거나 낮은 직급의 감수 직원이 시비를 걸어온다. 이럴 때 내가 써먹는 단골 대응책이 있다. 고객인 경우 내 품질에 이상이 없을 경우 이렇게 말한다. "이 사람 외부 번역 프로세스를 모르는 사람이다. 이런 것까지 원하려면 고객이 안에서 번역해야 한다. 나도 이전에 장으로서 번역물 받아본 사람인데 외부 번역가에게 이런 것까지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드물게 감수자가 딴지 거는 일도 있는데 보면 의역한다고 마구 고쳐서 나한테 돌아와도 지적질 다 무시하고 내 원본으로 보내면서 이렇게 말한다. "감수자 이 사람 초짜 아닌가? 의욕이 과도하고 상업 번역을 모르는 것 같으니 원 번역가의 스타일을 존중하라고 전해 달라"고 말한다. 이 부분에선 한 번도 문제가 더 커진 적이 없었다. 아마 감수자가 초짜였으니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고객이 나의 rebuttal에도 불구하고 심하게 대드는 경우에는 이렇게 말한다. 참고로 이 부분으로 한 외국 기업의 국내 감수자와 논의한 적이 있다. 내부 감사자가 바뀌니 몇 달 간 이전 감수자와 조율했던 번역 내용들을 새 감수자가 마냥 고치는 것이 아닌가. 에이전시에 내용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외부 번역을 할 때 불필요한 감수 내용이 개입되기 시작하면, 수정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오류의 위험이 커진다. 이런 건 고치지 말라고 오히려 내가 지적질을 했다. 그 회사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회의를 한 후에 함부로 고치지 않기로 했다. 그때 에이전시로부터 한 500달러 보너스를 받은 걸로 기억한다(좋은 회사랑 일해야 한다).  그 지적질을 반박하고 제3자 리뷰를 받으라고... 워낙 에이전시와 쌓아놓은 것이 있는지라 (그보다 어려운 작업물을 수백 건 하여도 문제가 없었으니) 문제가 되었던 적 없다. 그리고 단 한 차례 고객이 할인을 요구한다고 에이전시 측이 할인하자고 해서 7000달러 짜리 국내 기업 인수 문건을 25% 깎여본 적 있다. 사실 그 건은 한영 건으로 시간 촉박해서 그리 자랑스러운 번역물은 아니었는지라 할인에 합의했다. 이거 딱 한 건이다. 깔때기이기도 하지만, 번역가로 이따금 만나게 되는 사건에 대처하는 팁으로 전한다. 여기서 "번역가다워라" 함은 2번과는 상충되는 듯도 하지만, 전혀 다르다. 1) 돈 안 되는 거 하지 마라, 2) 작업물을 받을 땐 편집 안 해도 되는 작업물을 받아라, 3) 미니멈 차지 적용해라 (절대 $1, $2짜리 일하지 마라) 우린 번역가다. 세상에 2천원 짜리 일이 어디 있는가? 번역 두 시간 하고 문서 포매팅 한 시간 말도 안 된다. 문서 편집비는 추가로 받아내라(블로그에도 올린 글이지만, 1월에 사고 난 건 받아 처리할 때 홍콩의 에이전시와 주고 받은 이메일을 보면 놀랄 것이다. PDF 작업물이었는데 개판 싸웠다. 물론 일은 계속 받고 있다. 3월 중에 자기 회사 상위 30% 번역했다는 이멜 받았는데 이 회사 한심해서 그렇다. 기회 닿으면 소개하겠다), 3) 이게 유지 안 되면 딴 직업 찾아볼 때다. 그것이 시장 상황 때문이든 뭐든, 특히 젊은 사람이라면 더 나은 가치를 찾아 나서는 것이 맞을 것이다?(이 글에서 다룰 일은 아니나 쉽게 말해 프로그래밍을 배운다든가, 기업 내 임시직이라도 IT 번역을 배울 수 있는 기회 등)

추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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