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번역의 민낯, 열정 페이, 영상 번역가가 되려면 신중히 고려하라


주로 네이버 블로그에서 글을 써왔고, 최근에는 워드프레스로 이전 중입니다.


번역가와 캣툴에 관한 한, 가장 많은 글(책 한 권 분량)이 담긴 블로그 중 하나라 생각합니다.

네이버
https://blog.naver.com/mkimcpa

워드 프레스
www.gongbone.com








오늘은 전반적인 영상 업계에 관해 알아볼까 한다. 번역 업계는 나름대로 분류하자면 크게는 영상 번역, 문서 번역으로 구분할 수 있겠다, 많은 사람이 번역을 시작할 때 아마도 영화 번역을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일단 가장 쉽게 접하고 가장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 번역물이므로 당연한 일이다. 예를 들어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문서라든가 페이스북 등의 사용자는 물론 영상 번역 사용자를 능가하겠으나, 개봉작의 경우는 사용자 층이 매우 넓고 그 파급력도 상당하므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번역 영역이기도 하다. 그러나 번역가, 즉 번역물의 공급자 측면에서 바라보는 영상 번역업계의 실상은 그야말로 참담하기 그지없다. 여기서 참담하다고 함은 번역가에게 지급되는 요율이다. 7, 8년 전만 해도 영상 분량 10분당 7, 8만 원에 이르던 번역비는 번역 카페 올라오는 글들을 보건대 3만 원까지 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10분당 3만 원이라 하면 미국 드라마 한 편(약 50분이라고 가정하자)당 15만 원이다.


자, 그렇다면 드라마 한 편을 번역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나는 절대로 느리지 않은 번역가다. 오히려 그 반대다. 전성기 수준에 비해 크게 속도가 떨어졌지만, 매우 빠른 번역가에 속한다. 8시간 기준으로 문서 번역 일평균 4, 5천 단어를 소화한다. 이 정도면 어느 수치로 보아도 상당히 빠른 수준이다. 문서 번역은 기본적으로 영화보다 어렵다, 뭐 글의 맛 이런 거 얘기하지만 영화 대본은 원어로 최고의 품질이고 만인이 알아듣게 쓰여 있기 때문에 95%는 아주 쉽다, 물론 "죽은 시인의 사회" 같은 예외는 있겠으나). 얼마나 정확한지는 몰라도 대략 하루 2,500에서 3천 단어를 표준으로 본다(이 부분은 추후 별개의 주제로 다룰 것이다, 번역가의 수입과 직결된 문제이므로). 그렇다면 내가 영화 1편을 번역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일까?




빨라야 8시간이다. 빠르지 않네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으나, 실상은 이렇다.




이건 단순한 산수다. 번역 품질을 보장하려면 그나마 영상을 최소한 세 번은 봐야 하지 않을까? 한번은 번역하는 과정에서, 두 번째는 검수하는 과정에서, 세 번째는 최종 점검이겠다. 세 번째 점검 단계는 빨리 본다고 가정하자. 즉 2배속으로 본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영상을 보는 시간만 2.5배다. 이건 순전히 시청하는 시간만 계산한 것이다. 50 X2.5= 125분이다. 그렇다면 영화 보는 시간 빼면 6시간 안에 처리한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한심한 띄어쓰기, 영문 이름 표기법(사실 개봉작에선 많이 무시된다) 이런 것들로 인해 작업이 다 완성된 후에도 철자법 띄어쓰기 최종 검열만 45분은 족히 걸린다(제대로 하려면, 번역가들은 자기가 띄어쓰기 잘한다고 서로 싸운다. 이거 100% 자신할 수 있는 사람 절대 없다). 자 그러면 영상 시청 시간에 철자법, 맞춤법만 "최소" 두 시간이다. 그렇다면 번역에는 과연 얼마나 걸릴까? 그리고 영상 번역은 번역 도구 측면에서 굉장히 비효율적이다. 보통 영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므로 번역가에게 이상적으로 제작된 도구들이 별로 없다. 그리고 과거 국내에 많았던 미드, 일드 사이트에서 당일 번역을 뽑아내기도 했던 것 같은데 나도 몇 번 봤지만 상업적 품질에는 크게 미달한다(탓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타임스탬핑까지 소화할 테니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이걸 도대체 누가 하지? 불법 영상 사이트들이 그렇게 돈을 많이 버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야기가 잠시 옆으로 흘렀다. 8시간 번역에 15만 원? 심하면 7시간에도 끝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임금이 형편없으니 납품 품질도 "최소한"의 상업 품질이다. 나는 젊은 시절부터 프리랜스로 글을 써와서 "commercial writing"의 수준을 잘 안다. 번역회사에서 안 짤릴 정도로 쓰는 법의 귀재다. 시간당 2만원이면 괜찮네... 하시는 분도 있겠으나 아마 인터넷에서 찾아보면 영상 번역에 대해 "최저 임금도 안 돼요"란 글을 많이 보게 될 것이다. 고로 웬만한 사람은 10-12시간 걸린다고 봐야 한다(퀄리티는 무슨?). 이걸 성심껏 잘해주려고 하면 10시간 갖곤 언감생심(특히 처음 시작하는 번역가)이며, 이렇게 일해주는 순간, 문자 그대로 최저 임금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영어 잘해, 한글 잘써, 성실해, 이런 사람이 최저임금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건 참담한 일이다.



나는 문서 번역 시 시간당 4만 원-5만 원을 타깃으로 한다. 고로 자막을 하면 시간당 임금이 거의 절반밖에 안 나온다. 그리고 내 역량 대비 품질 측면에서 문서보다 더 낮은 품질로 보낸다. 번역회사에서 잘리지 않을 정도로만... 그렇다면 왜 영상 번역을 하는가. 딱 두 가지 이유다. 첫째, 프리랜서이다 보니 이따금씩(최근까지는 그런 경우도 많지 않았다) 일이 이해 안 되게 적은 달이 있다. 영어 표현을 빌자면 "비 오는 날 대비해서" 갖고 있다. 물량은 넘쳐나니까... 작년에는 5월에 번역회사가 플랫폼을 이전했는데 관심도 없어서 줄창 이메일 오는데 무시했다. 그러다 하반기 들면서 번역 물량의 기복이 심해지기 시작해서(현재와 향후 2, 3년간 문서 번역 업계의 대변환기이다, 기계 번역의 영향으로 풀이된다) 10월에 이르러서야 플랫폼에 등록했다. 그리고 운 좋게 물량 쏟아져 믿거나 말거나 딴 일 하면서 3주 남짓한 기간에 미드 17편 소화했다. 그야말로 추울 때 따듯하게 넘겼다. 영상 번역의 또 한 가지 매력이라면 초기 시작할 때 이력서에 넣기는 좋다. 입문도 쉬우면서 숟가락 얹히기 좋다. 난 참고로 3-500편 사이 정도 한 것 같다. 물론 영상번역도 잘하면 그쪽으로만 연간 1억 버는 사람 있다고 하지만, 그건 역시 상위 5%, 아니 1%일 터이고 어차피 요즘 외화도 많이 수입 안 된다. 비디오 쪽으로 빠지면 그건 또다른 세상이고 노가다 인생의 시작이다. 나도 처음에는 영상 번역 타이틀을 이력서에 넣었지만 그건 문서 번역의 세계에선 인정도 안 한다. 참고로 나의 이력서에서 자막 이력 부분은 맨 밑바닥이다. 그리고 거기엔 매우 근사한 제목의 영상도 많다 (본 시리즈, 007, 하우스 오브 카드 등등) 하지만 맨 밑비닥에 깔아 놓는다. 스님이 냉면 가게에서 냉면 고기는 밑바닥에 깔아놓으란 우스갯소리처럼.




영상 번역 학원이니 이런 것들에 현혹되지 말아라. 그래서 나는 영상 번역을 하고 싶다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조언하고 싶다. 이미 영상번역 학원에 가서 뭘 배워야겠다면 당신은 기본적으로 자질이 부족하다. 나를 비롯한 경험 풍부한 번역가들은 다 독학으로 배웠다고 보면 된다. 그거 안 되면 번역업계에서 일 수주하기도 어렵다. 이런 말 있다 "돈 버는 법" 가르쳐준다는 광고가 넘쳐난다. 블로그도 마찬가지지, 그렇게 잘 벌리면 직접 벌지 왜 가르치느냐 하고 한다. 번역 학원 선생들 얼마 버는지 짐작해 봐라.




그리고 열정 페이에 일하지 말라. 참고로 영상번역 단가는 외국에서도 무너진 지 오래여서 proz 같은 커뮤니티 사이트 들어가면 누구나 금세 알 수 있다. 업계가 이렇게 된 이유는 글로벌 차원에서나 국내 차원에서나 독식 체계이기 때문이다. 단 1개의 회사만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 의견으로는 그 회사가 업계 다 죽였다. 메이저 스튜디오 영화를 다 처리하니 근거 없는 추측이지만 70, 80% 되는 것 같다. 스웨데인가, 한 스칸디나비아 국가에선 영상 번역가 조합이 잘된 곳이 있었는데 그 회사가 거기에 진출하며 영상번역물을 독식해 대규모 조합 차원의 파업 사태가 벌어지기까지 했다.번역가 대우가 나쁜 게 어제오늘의 일은 아닌 것은 사실이나, 그중에서도 번역가 중 가장 앵벌이가 영상 번역이다. 물량은 있다. 그러나 열정 페이다. 물론 바닥에서 시작해 훌륭한 개봉작 영화 번역가가 될 수도 있겠으나 그럴 정도의 실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른 쉬운 길이 분명 있을 것이고 그리 어렵지 않게 오를 것이다. (6개월에서 1년이면 안다) 언어, 외국어 실력을 지닌 사람치고는 그 길이 필요 이상으로 험난하다. 전 국민이 어차피 1%밖에 못 들어가는 SKY 대학 보내려고 비효율적인 삶을 사는데 번역가가 되어서도 그런 길을 걷는다는 건 인재의 낭비다. 이 부분은 10번의 칼럼도 쓸 수 있을 것 같다.




영상 번역 업계도 적폐라고 생각한다. 희망 없는 일을 가르친다고 수강료 받고 subtitle workshop 수준의 소프트웨어 팔고...(요즘도 파는진 모르겠다. 이전엔 번역회사에서도 팔았다) 왜 이게 가능할까? 노동력을 길들이려는 또 하나의 적폐라는 것이 나의 의견이다. 여지썩 그런 곳이 있다면 거짓 희망을 팔고 노예를 재생산한다. 정 배워야겠다면 나는 이걸 권유한다. subtitle workshop이든 뭐든 무료 소프트웨어 다온로드한 후, 본인이 직접 만들어 본다. 1주일이면 꿰뚫을 것이다. 아마 이 과정이 지루하고 너무 어렵다면 번역가로서도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 이유는 서브타이틀 배우는 것보다 제대로 된 번역가가 되기 위해 꿰툻어야 할 어려운 것들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영상 번역 업계가 나아지는 데 가장 좋은 길이 몇 가지 있다.




1. 최저 임금 조속 1만원대로 인상


문재인 정부가 성공해서 꼭 최저 임금을 시간당 1만 원으로 내후년에 올려놔야 한다. 그래야 말만 좋고 번역가를 기만하는 "열정 페이"가 사라진다. 번역가는 아무래도 더 주겠지.




2. "열정 페이"로 일하기를 거부하라.


차라리 "놀아라." 하고 싶은 일 해라. 요즘은 뭘 해도 자기 분야 1등이면 먹고 산다.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 하고 살아라 (난 커리어의 황혼기에 이 일을 시작했고 얘전부터 글쓰기를 정말 사랑해왔다. 이 시간 낭비일 글을 쓰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차라리 이런 글 무료로 쓰지, 열정 페이 안 한다). 번역료 안 올라간다. 처음에 말도 안 되는 돈에 받았으면 몰라도. 설령 처음에 싸게 해주고 나중에 좀 올려줬다 해도 열정 페이다. 어느 번역을 사랑하는 한 번역가는 카페에 자신은 혼삿길과 부모님과의 관계까지 희생해 가면서 번역가의 길을 걸었다고 한다. 그만큼 번역가는 주류 사회에서는 높이 인정받지 못하는 직업니다. 가방끈 좀 긴데 할 일 없다고 번역하겠다면 재고하기를 바란다.

3. 정말 번역을 하루 12시간씩 해도 좋다면 해라. 적성에 맞는 것이니.


그래도 번역하고 싶다면 이렇게 조언한다. 6개월을 전적으로 번역 일에 붙어 봐라 (번역만 24시간 생각하고 해본다). 그래서 주 40시간 일하게 되면 그때 자신의 벌이가 얼마인지 확인해 보고 평가해봐라. 과연 자신에게 번역이 가치가 있고 자신이 벌 수 있는 돈에 만족하는지. 기본적으로 번역은 하루 16시간 일하는 날이 많다. 물론 놀 때는 놀지만. 따라서 그런 열정이 없으면 번역해서 성공하기 힘들다. 예전 내 회사 직원 중에 "폭식, 폭음, 폭면"으로 유명한 프로그래머가 있었는데 이와 유사한 게 필요하다. 하루 12시간 꼼짝 않고 1주일 번역만 할 수 있어야 한다. 이건 초집중을 요하는 것이고 좋아하지 않으면 못한다. (이 부분은 추후 글에서 다루겠다)

참고로 난 앞서 언급한 독점적 영상번역 회사와 한 7, 8년 가까이 일해왔는데(문라이팅 시절부터) 그동안 한 세 차례 단가 인하하자고 왔다(물론 다 거부했다). 단가 인하하지 않으면 일감 줄을 수 있다고 협박한 적도 있다(그러지 않아도 관둘 요량이다. 넘치면 보내라고 했다). 그래서 3만보단 훨 많이 받는다. 요즘 다행히도 저품질 번역에 이골이 난 넷플릭스가 무려 번역비를 50% 가까이 올리고 지접 번역하러 나선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단가에선 제대로 된 번역이 나올 수 없다. Period....(영어 표현, 토 달지 말아라).

한없이 늘어졌다. 편견 가득한 글처럼 안 보이게 쓰려면 지금까지 쓴 시간의 두 세배는 걸릴 것이므로, 일방적인 논리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영상 번역가들을 폄훼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나도 영상 번역한다). 그냥 이쯤에서 절반의 사실만 액면 그대로 나열(분석은 불가능)한 채 마무리한다

PS: 난 이 나라의 저임금 실태를 볼 때 일 안 하려 하는 젊은 세대들을 이해한다. 포기한 젊은이들이 많다고 기성세대들이 나무라는데 이야말로 전근대적인 발상이다. 난 자유로이 사는 영혼들을 오히려 칭송한다. 자기 체질에 맞으면 버스킹도 좋고 그렇다. 90만원으로 이른바 OECD 국가에서 사느니, 하고 싶은 것 재주것하고 사는 게 낫다. 자기가 최고가 될 수 있는 것... 그것이 뭐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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